음악, 편파판정의 그늘
음악을 전공하게 된다면 한번 즈음은 편파판정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생긴다. 음악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기에 판정시비는 피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국제 콩쿠르의 경우, 2003년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으나 편파판정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1, 2등을 한 독일과 중국 피아니스트의 스승이 심사위원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2등을 한 중국인의 실력은 언론조차도 의구심을 드러냈었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는 이보 포코렐리치가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결과에 격분하며 심사위원직을 사퇴했다. 그녀는 진정한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항의하였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국내에서도 2023년도 음대입시에서 숙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가 입시비리에 연루되었다. 두 학교 모두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교수들이 자신들이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특혜를 준 것으로 의심되기 때문이었다. 2022년에는 연대 교수가 입시 곡을 자신의 제자에게 미리 유출하여 징역형을 받았다.
이렇듯 음악에 대한 평가는 주관이 개입된 정성평가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수학이나 과학같이 수치화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명확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점수로 환산되는 것은 심사위원들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내가 높이 평가하는 연주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전문가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취향과 음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아노가 없던 시대의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들은 해석이 각양각색이다. 한번은 독일에서 공부한 친구와 함께 미국 줄리어드 음대 출신 피아니스트의 독주회를 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연주자가 바흐를 너무 로맨틱하게 친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반면 나는 그런 연주 스타일에 거부감이 없었다.
대가들 조차도 서로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쇼팽은 베토벤의 급격히 변화하는 다이나믹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뭔가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한 베토벤의 음악은 쇼팽의 세련된 센티멘탈한 감성과는 대비된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는 음악이 역동적인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통해 사물과 풍경을 묘사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이렇듯 음악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없다. 그러기에 편파판정이나 부정비리를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들도 있다. 이를테면 실기시험에서는 최고점과 최저점을 뺀 나머지 점수들로 평균을 낸다. 너무 평균과 동떨어진 점수는 공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사위원이 두 세명밖에 없다면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커튼으로 가리고 연주자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오디션이나 시험을 보기도 한다. 이 때 뭔가 특이한 소리를 내거나 행동을 보인다면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심사위원에게 암시하는 행위는 의심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다 동영상으로 녹화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평가를 보장할 수는 없다. 개인의 음악적 견해에 대한 진위여부는 판가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황 증거를 보고 판단할 뿐이다.
그러므로 입시곡들은 주로 음악보다는 테크닉 위주로 평가할 수 있는 곡들이 많다. 혹 연주 중 틀리거나 멈추는 실수를 하게 된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그 순간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결코 한 사람의 전반적인 음악적 재능과 자질에 대한 절대적 평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음악에 대한 비교 평가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가 반드시 테크닉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어떤 경우 전문가들은 높이 평가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음악을 한다면 이런 음악 평가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받는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반면 너무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그 평가가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