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rch Music

성당에서 교회의 성가들을 써도 될까?

성당에서 교회의 성가들을 써도 되는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들 중 하나는 성가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개종이란 표현은 분명 두 종교가 다르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비슷한 구석이 꽤 많았다. 둘 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음악을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두 종교안에서 중복되게 쓰이는 성가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가사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나에게 익숙한 성가선율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지휘나 반주를 할 때 곡선정에 있어서 종종 고민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많이 쓰이지만 성당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해도 되는지 속시원히 답해 줄 곳이 없었다. 개신교에서는 잘 알려진 작곡가가 쓴 훌륭한 곡을 성당에서 사용해도 되는지도 의문스러웠다.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의 성음악 부분에 따르면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들은 가사에 있어서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형식에 있어서는 품위를 갖추며 각 나라의 언어와 전통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회중들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음악을 권장한다. 1

합창음악의 선곡 기준

하지만 위의 기준을 염두에 두어도 개신교의 음악을 성당에서 쓰고자 할 때 여전히 고민이 되었다. 예를 들어 우 효원 이라는 작곡가가 쓴 ‘그가 He is’ 라는 곡은 교회에서 많이 불려진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여 예전에 성당에서 지휘를 할 때 하기도 했다.

우효원 그가 He is

가사로나 음악 형식으로나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보이지만 성당에서는 그리 흔하게 쓰이는 곡은 아니다. 아무래도 가톨릭과 기독교의 성가대는 기대되는 역할이 좀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종교의 성격과 전례의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와는 다르게 가톨릭의 예식은 좀 더 묵상적이다. 그러므로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는 크고 화려한 곡보다는 성체나 봉헌등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곡들이 더 적합해 보인다. 위 곡은 기독교의 고난주간에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성당에서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가사로는 사순절에 맞는 내용이지만 뒷부분의 스타일은 웅장하기 때문이다. 성당 사순절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천주교는 전례의 흐름에 맞춰야 하므로 너무 긴 곡도 적합하지 않다.

오르간 연주곡의 선정

반주를 할 때에도 묵상곡이나 후주 선곡에 있어서 고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례를 위한 오르간 악보들을 구입할 때는 잘 살펴보아야 했다. 특별히 성가를 편곡한 수입악보 모음집의 경우 어느 종교에 속한 곡인지 분별하는데 애를 먹었다. 같은 종교이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잘 불려지지 않는 외국 성가들도 꽤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같은 유명한 곡은 다른 반주자들에게 물어보면 연주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명쾌하지는 않았다.절기와 신부님의 성향, 또 성당의 분위기에 따라 정하기를 권고했다. 또한 흑인 영가곡을 편곡한 곡인 “Every Time I Feel the Spirit” arr. by Richard Elliott 을 후주로 해보았는데 이에 대해 교중미사보다는 다른 미사에서 쓰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의견도 들었다. 하지만 그 기준이 모호했고 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성령강림대축일 같은 때는 위와 같은 Spiritual 은 절기에도 맞고 신자들의 신심을 고취시키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음악적 스타일 때문이라면 성당 분위기에 맞춰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아래는 다른 오르가니스트의 위 곡 연주영상이다.

“Every Time I Feel the Spirit” arr. by Richard Elliott

어쩌면 미사에 참석한 대다수의 교우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또한 신부님이나 수녀님, 혹은 지휘자나 성가단장, 반주단장 등 교회 내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또 다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가(Hymn)의 적합성 판단

가톨릭에서 개신교 찬송가의 사용에 대해 쓴 ‘성가이야기‘ 라는 글을 보았다.2 이 글에 따르면 가톨릭 성가에는 개신교와 공유하고 있는 성가들이 60개 정도 있다고 한다. 기독교의 찬송가, 가톨릭의 찬미가, 성가 모두 영어로 Hymnus 혹은 Hymn이다. 전례기도문이나 성경이 아닌 개인의 신앙고백이 담긴 시를 가사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가톨릭의 구분이 딱히 없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가사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멜로디에 있어서는 그 성질과 사용에 있어서 세속적이거나 그런 가사를 담았던 선율의 차용을 경계해야 한다.

가사는 언어이니 뜻이 왠만큼 명확히 전달된다 하더라도 선율은 그 적합성의 판단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음악에 있어서 좋고 나쁨, 선과 악 등의 윤리적인 성격에 대한 판단은 시대와 나라, 사조 등에 의해 계속 변해왔기 때문이다. 성당 오르가니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바흐도 개신교 작곡가였고 그의 작품에는 세속적인 노래에서 차용한 선율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는 마태수난곡에 쓰인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O Sacred Head, now wounded)’ 일 것이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구분

음악에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 있다는 생각은 고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여기에서는 유해한 선법과 악기들을 구분했다. 장단음계를 사용하는 바로크 음악이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왔다.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하기까지 하였다.3 고전에서 낭만시대로 넘어올 때도 사람들이 음악에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피아노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쇼팽도 동시대의 평론가들에게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괴상한 음악’이라고 취급당했다.4 에모토 마사루라는 유사과학자가 쓴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에 의하면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에 따라 물의 결정체가 모습을 바꾼다고까지 했다.

국가별로도 음악의 해악유무를 판단하는 기준들이 있다. 북한에서는 뉴에이지 음악을 퇴폐적인 음악이라 규정한다. 북한 피아니스트 김철웅은 ‘가을의 속삭임‘ 이라는 Richard Clayderman의 음악을 몰래 연주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탈북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듣기에는 그저 오래된 팝송같은 곡인데 말이다.

지식을 넘어서는 사람에 근거한 판단

이렇듯 음악의 해악유무 판단은 절대적일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선곡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코린도 신자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에서 힌트를 얻는다.5 그에 따르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더라도 그것을 먹는 행위가 사람을 더럽힐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없는 약한 양심이 있는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안먹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음악들에 대한 선악판단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음악의 사용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안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반면 교회의 음악을 책임지는 자가 시대에 발맞추어 음악적으로도 교우들을 성장시키는 임무 또한 있다고 본다면 보수적인 태도로 관습에 얽매여서도 안될 것 같다.

추천 찬양곡

기독교에서 유명한 곡이지만 성당에서 쓰이지 않는 성가 중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이라는 곡이 있다. 미국인 작곡가인 Will L. Thompson 이 1880년에 작곡하였고 개신교 새찬송가에는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로 알려져 있다. 가사는 마르코 복음 10장 49절에 근거한다고도 하고 혹은 마태오복음 11장 28절이라고도 한다. 6 내용은 주님께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이 곡은 신앙에서 돌아서고 싶었던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찬양이었다.

원곡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calling for you and for me;
see, on the portals he’s waiting and watching,
watching for you and for me.

Refrain:
Come home, come home;
you who are weary come home;
earnestly, tenderly, Jesus is calling,
calling, O sinner, come home!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체 하려나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나에게 울림을 주는 이 찬양으로 부족하지만 바이올린과 피아노 듀오곡을 작곡해 보았다. 성악이나 합창곡은 많이 있지만 기악곡은 잘 없는 것 같았다. 음역대가 맞다면 바이올린 대신 다른 악기를 솔로로 대신 쓸 수도 있다. 바이올린 파트는 중간 멜리스마 부분 이외에는 원곡과 유사하다. 하지만 피아노가 다양한 화성으로 보완하려 했다. 성악곡은 많이 느리지만 기악의 특성을 살려 조금 빠르고 아름다운 곡으로 편곡해 보려했다. 피아노가 바이올린보다 화성적으로 음역대가 높은 곳들이 있으므로 두 악기의 음량의 밸런스에 신경쓰면 좋을 듯 하다.

Softly and Tenderly Hymn Arrangement Violin and Piano
  1.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전례헌장 성음악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doctrine/doctrine_view.asp?menu=concil&kid=1&seq=2373&level1=2&level2=0&level3=7&level4=0&level5=0&level6=0&level7=&lang=ko ↩︎
  2. 월간 빛 2012년 1월 No. 245 ‘성가이야기’ 김 종헌 신부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1526 ↩︎
  3. https://namu.wiki/w/%EB%B0%94%EB%A1%9C%ED%81%AC%20%EC%9D%8C%EC%95%85 ↩︎
  4. https://m.cafe.daum.net/SPOFriends/CnOO/25?listURI=%2FSPOFriends%2FCnOO ↩︎
  5. https://bible.cbck.or.kr/Knb/1Cor/8 ↩︎
  6. https://en.wikipedia.org/wiki/Softly_and_Tender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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