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길 위에서 Schubert의 음악을 만나다.
슈베르트 음악이 주는 기쁨과 위로
한때 작곡가가 인생의 뒤안길에서 쓴 작품들에 매료되어 후기작품들을 찾아 공부했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은 중기 작품들까지만 해도 폭발하는 심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 소나타의 부제들은 열정, 비창, 폭풍 등 격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후기 작품들은 이런 분출하는 활화산 같은 적나라한 감정이 아닌 절제와 승화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저 억누르는 절제가 아니라 삶의 모진 풍파 속에서 열매 맺은 절제와 포용이다.
이런 경향은 같은 고전주의 작곡가인 슈베르트에게서도 나타난다.
슈베르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짧은 생에서 자신을 늘 방랑자로 여겼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체 헤메는 듯한 그의 심상은 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육체의 고통중에서 또 불안정한 삶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늘 마주하는 듯한 그의 삶과 음악이, 때론 절절한 고통과 공포속에 있기도 했던 나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유학시절 혼자 독학하다시피 씨름했던 Schubert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다시 꺼내서 쳐보았다.
Piano Sonata No.21 in B flat major D.960.
그의 음악이 지금의 나를 잡아주고 다독여주며 이끌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나의 간절함일지도 모른다.
가끔씩 나오는 행진곡풍의 선율은 그의 분투와 승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음, 하지만 끝이 안 보일듯한 깊은 심연, 필연적인 싸움과 승전보, 그리고 그 무엇보다 마음에 밀려드는 맑고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그는 멜로디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에 잊혀질 만하면 나타나는 섬뜩한 어둠의 목소리는 대면해야 할 나의 숙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이 곡은 후기 작품 답게 잔잔하고 포용하는 듯한 따듯한 화성으로 시작된다. 참으로 치열하기도 한 삶의 마지막에는 왜 바다와 같은 포용력이 생기는 걸까. 고군분투하던 허망한 싸움의 덧없음 속에서 나는 질문한다.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저 나그네 된 방황의 그 길 위에서 그는 자신의 소리를 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그리 어둡고 춥지만은 않았을 것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방랑자처럼 느껴지는 이 길 위에서 나 또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뭔가 잘못된 것 같고 끝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나의 방랑의 길 위에서 그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가 작은 위로의 등불이 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영원한 방랑자, 슈베르트의 삶과 음악이 나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