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위로의 음악 Erik Satie
한때는 음악을 감정의 표현이라 정의하며 감정의 역동성과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음악의 본질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음악사를 돌아보면 항상 그 시대의 미학을 넘어서는 발상을 통해 새로운 음악세계가 펼쳐졌다.
여기서 발전이란 표현은 부적절해 보인다. 예술에서의 파격적인 행보는 새로운 정신과 내용을 담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규칙과 정의들은 새로운 표현 욕구를 채우기에 더 이상 적합한 도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선구자적인 음악가들이 있지만 문득 Erik Satie가 떠올랐다. 그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랐던 사람.
온갖 기교로 Virtuoso 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 쉬워 보일 수 있고 특별한 클라이막스가 없어 보이는 작품들은 구성력이 없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완성한 음악가이다.
어쩌면 소품같이 느껴지는 그의 음악은 결코 어린이나 beginner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적이면서도 달콤한 그의 음악은 스며드는 기쁨과 평화를 준다. 늘 달려야만 할 것 같은 나를 순간 멈추게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현재의 이 순간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현재를 행복한지 불행한지 따질 필요 없이그저 그 안에 분명 존재하는 작은 기쁨의 순간들을 느껴보라고 손짓하는 듯 하다.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내가 경험하고 누리는 이 인생은 선물과도 같다고 하면서 말이다.
베토벤처럼 쇼팽처럼 그렇게 절절한 감정을 토해내지 않고 명료한 기승전결의 전개를 만들어야만 할 듯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되어도 좋다. 그저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편안하고 행복하면 된다.
빠르고 기교적이고 않아도 평범한 이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조용히 말을 하는 것 같고 마치 생각을 이야기하는 듯한 음악, 어쩌면 New Age 음악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분명 그것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평생 가난의 굴레속에서 자신을 ‘가난뱅이씨’라고 칭해지기도 했고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해야하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단 한번의 짧은 사랑의 추억속에서 살았던 인생은 어쩌면 객관적으로는 성공적이고 행복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등의 평가는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역동의 시간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음악가로 불리워지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지금 나에게도의미있게 다가온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오늘 눈이 온다.
하얗게 덮인 포근하고도 차가운 세상과 그의 음악이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대표적인 피아노 작품인 짐노페디를 들으면 느리디 느린 걸음 같은 음악은 혹 낙담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내 심장과 박동을 같이한다. 손잡아주고 나에게 발맞추어 느리게 함께 가주는 것 같다.
Erik Satie Gymnopedies 1. Lent et douloureux
고독과 사랑의 환희가 Satie만의 언어로 승화된 음악 Ju te veux(난 당신을 원해요) 도 마음을 울림을 준다.
Jessy Norman의 어두운 듯 따뜻한 음색과 달콤한 선율이 이 음악과 잘 어울린다.
저는 당신의 고독을 이해해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저는 당신의 뜻에 따릅니다.
나를 당신의 연인으로 받아주세요. 우리에게 정숙함이란 없을거에요. 더이상의 고독은
저는 당신의 고귀한 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그 순간을요. 저는 당신을 원해요.
제게 후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겐 질투심도 없지요. 당신 곁에 거기에 가까이에서 내 삶을 살아가길 원해요.
그리고 내 몸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를
영원히 얽혀 같은 화염에 싸여 사랑의 환상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느낄거예요.
누군가 나의 고독을 이해한다는 것은 영혼까지 닿는 치유의 힘이다.
그 자신을 위로했던 그의 음악이 듣는 나 또한 위로한다. 위로 받기 충분한 기쁨의 선율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