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음악가들 – 지휘자와 반주자
지휘자와 반주자와의 관계
전문 합창단이 아니라면 사실 전례에서 지휘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외국 교회에서는 큰 교회가 아닌 이상 건반주자 한 사람이 지휘와 반주를 모두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휘자의 자리가 보편화 되어 있다. 그런데 그만큼 지휘자와 반주자와의 불화 또한 비일비재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합창단 반주를 했다. 크고 작게 반주, 지휘 혹은 단원으로 활동했던 합창단은 삼십개가 넘는 것 같다.
반주나 지휘를 할 때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중 두 명은 많이 힘들었다. 반대로 지휘자와 반주자가 싸워서 나가면서 공석이 된 곳에 지휘나 반주로 가기도 했다. 반주자들은 지휘자 때문에 견디다 못해 나왔다는 뒷 이야기를 꽤 한다. 아예 그 자리에서 보란 듯이 박차고 나온 경우까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어떤 지휘자가 쓴 책에는 반주자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고 써 있기까지 하다.
사실 지휘자의 기량은 개인차가 크다. 박자 젓기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기술이기에 비전공자에서부터 합창지휘 박사 전공까지 누구나 지휘를 할 수 있다. 심한 경우 지휘자가 못나오면 성가대석에서 아무나 나와서 지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주는 다르다. 아무나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건반주자들은 고난도의 음악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무나 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지휘자보다는 반주자로 내몰린다. 그리고 자신보다 음악적으로 신뢰가 안되고 인격적으로도 미성숙한 지휘자에게 휘둘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어떤 지휘자는 악보를 코앞에서 주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반주자의 실수를 지적한다. 반주자는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바로 티가 난다. 하지만 지휘는 상대적으로 준비가 안되어도 임기웅변으로 무마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또한 지휘자는 앞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고 반주자는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는 입장이다. 어떤 지휘자는 무조건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며 반주자를 누르려 하기도 한다. 그래야 자신의 권위가 세워진다것은 착각이다. 혹 반주자가 내는 이견을 자신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무시하려고만 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도 지휘자였을 때 연습 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반주자가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악기 연주자는 한 음이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 있다. 반주자는 제압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외국에서는 그 역량을 인정하여 건반주자를 주로 음악감독으로 세운다. 반주자가 지휘자보다 밑에 있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성악이나 작곡 혹은 다른 악기 하는 지휘자들은 같은 음악적 파트너로써 반주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원하는 존중과 협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지휘자 혹은 반주자의 부재시
혹 지휘자가 연습의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부재하는 경우가 많다면 어떨까? 지휘자가 자신의 외부 경력쌓기에 바빠서, 혹은 성가대에 별 관심이 없어서, 성격상 무책임하고 불성실해서 등 여러 이유로 이런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지휘자가 그만둘 생각이 없고 보조 지휘자를 세운다면 철저하게 부지휘자와 소통해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아무리 자기 수제자를 훈련시킨다해도 모든 디테일이 똑같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거의 모든 연습을 자신이 아닌 부지휘자가 한다면 말이다.
내가 보아 온 국내외 유명 합창지휘자들 중 부지휘자가 두 명씩이나 있고 발성만 전담하는 보컬 코치까지 있는 분들도 그 바쁜 스케줄 가운데 대부분의 연습 리허설은 본인이 직접 했다. 지휘자가 연습의 반이상을 빠진다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어도 용납될 수는 없다. 같이 일하는 반주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사실 지휘자가 없다해도 반주자가 얼마든지 혼자 연습시킬 수 있다. 굳이 부지휘를 세울 필요도 없다. 정작 연주에서 호흡을 맞춰야 하는 사람이 지휘자와 반주자라면 제3자가 끼어들어 괜한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부지휘자가 반주자를 기선제압하여 자신의 위상을 증명하려 하는 콤플렉스가 있다면 반주자의 삶은 심각하게 파괴될 수도 있다. 만약 부지휘자가 지휘자 가족이라면 더 소통이 될 것 같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도리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소통이 되지 않은 지휘자는 와서 다시 자기 스타일대로 하며 반주자를 혼란과 괴로움에 빠뜨릴 것이다. 지휘자마다 첫 음 주는 방식까지도 다르다. 그러기에 반주자가 두 지휘자들의 다르게 하는 부분들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세 명이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반주자는 매번 바뀌는 지휘자들이 각자 자기방식대로 하는 대로 맞춰주어야 한다. 이런 정신사나움은 반주자에게는 거의 횡포에 가깝다. 엄연히 반주자는 지휘자 한 명과 소통하고 호흡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이 상황이 개선이 안된다면 누구 한 사람이 그만 두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력이 작용한다. 지휘자가 그곳의 터줏대감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시시비비를 떠나 결국 반주자가 떠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전례에서는 지휘자의 부재보다는 반주자의 부재에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외국 사람들이 왜 건반주자를 음악감독으로 고용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와 음악가 사이의 계약의 필요성
교회나 성당에서 지휘자나 반주자를 고용할 때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경우 한번 직을 맡으면 마치 종신직처럼 자신이 그만두지 않을 때까지 계속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만약 한 곳에서 10년 이상 지휘를 하게 되면 마치 성가대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개인 성가대인 냥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지휘자가 원래 교회에서 정한 연습시간을 본인 마음대로 없앤다던지, 자신이 지도해야 하는 연습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던지, 정해진 휴가기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빠지며 돈은 그대로 받는다던지 할 수도 있다. 특히 성당은 지역 기반으로 모이므로 지역사회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쌓는다. 만약 성가단장등과 이런 친분이 있다면 지휘자는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가대를 좌지우지 하며 싫은 사람은 알아서 나가라는 식이 된다.
하지만 신부님들도 몇년에 한번씩 부패방지를 위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다. 하물며 교회음악가들이 십 몇년 씩 계속하는 반 종신직이 된다면 폐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는 한 교회는 부적절한 지휘자나 반주자를 쫓아내지 못한다. 사실 한국 음악가들의 직업시장은 열악하고 계속 배출되는 훌륭한 젊은 음악가들이 자리가 없어 헤매는 실정이다. 학교처럼 교회도 일정한 계약 기간이 있고 재계약으로 연임하는 제도가 있다면 제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 마음대로 교회의 단체를 휘두르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휘자나 반주자가 중간에 갑자기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 피치 못할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거나 아님 반주자가 지휘자와 안맞아서 나가는 등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그만 둘 수 있다. 오죽하면 나가나 싶을 수도 있지만 계약 위반에 따른 조치가 안 되어있을 경우 교회도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문서로 계약과 재계약이라는 중간 멈춤과 평가의 시스템을 통해 서로의 권리와 의무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실하고 자격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부적격한 사람들은 걸러낼 수 있다. 아무리 봉사직의 성격이 강하고 가족과 같은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라 해도 교회와 교회음악가 사이에는 계약이 필요해 보인다.